책 소개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이 있다. 윤희준의 언어는 그 말 이전에 존재하는 고요를 붙잡는다.
무한의 구조를 활자화하여 감각과 존재 너머, 형이상학의 바다를 유영하는 단 하나의 시적 산문집!
현대미술, 심리학, 언어학, 고전 신화를 넘나드는 감각. 이 작품은 철학적 깊이와 감정의 진동이 교차하는 시적 산문집이다. 단순한 상처의 진술이 아닌, 존재와 언어, 고통과 지각의 경계를 탐색하는 감각적 산문이자 형이상학적 고백이다. 시집을 이루는 한 편 한 편은 우주처럼 독립적이면서도, 전체로 이어지는 악장의 구조 속에서 시인이 경험한 삶의 파열과 회복을 담아낸다. 절망과 침묵의 이면에서 떠오르는 미세한 기척은 독자에게도 생경한 형이상학적 감각으로 다가온다.
이 시집에서 언어는 감정의 도구가 아니라 존재의 잔해를 복원하는 실험 장치로 작동한다. 빛의 굴절, 생명의 파동, 비물질의 운동성 같은 개념이 활자 안에서 유기적으로 호흡하며 고도로 응축된 지성의 산물로 완성된다. 윤희준 작가는 이 책을 통해 감각과 사유의 경계를 허물고 존재의 물성에 가까운 시적 밀도를 구현해 낸다. 그 결과 독자는 언어의 경계 앞에서 서성이는 동시에 문장 너머의 고요를 감각하게 된다. 그 독특한 맛에 기꺼이 이끌리고 싶은 사람이라면 언제든 겪어봐도 좋을 조그마한 사건이다.
목차
책 속으로
이 책을 쓰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불안과 고통이 자그마한 기쁨마저 짓밟아온 제 십 대와 이십 대를 이 책으로 결산하고 싶었습니다. 저의 시가 독백에 그치기보다는, 말로 다 못 할 슬픔과 분노를 숨기고 짊어진 영혼들에 가닿기를, 그리고 그들을 에워싼 고독 밖 조심스러운 인기척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 책이 누군가의 닫힌 문 앞에 무사히 도착하길 바랍니다.
시집의 첫 페이지에 ‘연인을 화장하며 쇠도 녹일 사랑으로 쓴다’라는 문장이 강렬하게 다가왔는데요. 이 문장으로 서문을 열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연인의 관이 타오르는 모습, 그것이 제가 보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살아가며 매 순간 상실을 예견하지만, 유리 너머로 화염이 사랑을 집어삼키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연인을 불태우는 화염보다 맹렬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열화에 사로잡힌 가슴에서도 잦아들지 않는 통곡과 울부짖음, 즉 '쇠도 녹일 사랑'입니다. 이 시집이 머나먼 ‘무풍지대’에서 부친 편지라면, 바로 그 사랑으로 글을 적었다는 의미로 서문을 열었습니다.
작가님께 ‘시’란 무엇이며, 앞으로 어떤 시들을 써나가고 싶으신가요? 긴 타지 생활을 하면서 예이츠나 윤동주 시인의 시에 의지하곤 했습니다. 지금도 불안, 슬픔, 고통의 격류가 찾아오면 윤동주 시인의 ‘팔복’을 절박하게 되뇌곤 합니다. 제가 시에 의지하는 이유는, 시가 저 자신보다도 진실하게 제 삶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언어로써 무형의 경험을 가장 진실하게 포착하는 작업, 혹은 그러한 시도. 그 결과물.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시입니다. 앞으로도 ‘진실성’을 핵심으로, 윤동주 시인처럼 숨 메는 심정으로 거짓 없이 고백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한 말씀 전해주신다면. 건네고 싶은 말이 많아서,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굳이 고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살아주세요. 가지 마세요. 살다 보면 나아질 것이라는 거짓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희망을 믿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는 걸 압니다. 비통하고, 무의미하고, 괴롭고, 절망스럽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부디 살아주세요.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지만,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언젠가 내가 원죄라고 일컬었던 저 별의 사랑이 지금까지도 델 듯하지 않을 리 없다. 그래서 그들이 태양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나는 스물일곱 날마다 규칙적으로 공전하며 사철의 변함없는 단위를 이룬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얼굴을 감쌀 수 없으며, 곧고 단단한 손을 잡을 수 없더라도 그렇게 한다. 사랑이 나를 영원한 고요 속으로 이끌었을지라도.
비가 내린다. 최초의 소리가 쏟아진다. 그 사이에 야성적인 허공이 있다. 쏟아져 내리는 빗속에 함께 있다. 섬뜩한 틈새에서 숨 쉬는 허공이 있다. 그리고 고요 속의 짐승이 틈새에서 비틀거리며 태어난다. 빗속에서 우거지는 소리가 생명을 축복할 때 침묵의 야성적인 허공도 그곳에 있다.
이 마음은 생명이 살기에 너무도 끔찍한 곳이나 그 덕에 당신의 뺨이 그을린 이유를 알 수 있다 어떤 악몽으로부터 깨어났는지 묻지 않아도 된다
꺾일 줄 모르는 양심이 절망보다 강하여, 끝끝내 자비를 바라지 않으려니 구원도 파멸도 아닌, 분노도 멸시도 아닌, 이해도 용서도 아닌 오로지 한 가지만을 바라려니 네 척박한 세계에는 용서가 없고 오로지 살을 에는 바람이 불어올 뿐이려니
그리고 조금 더 오르자, 생명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들풀과 야생마들은 우리가 영혼의 심부에서 목격하곤 하는 생명의 견딜 수 없는 근원적 형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낮과 밤 속에서 생동했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지나온 나선형 계단 아래로 검은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 사람이 있었다. 언어가 주어진 그들은 하나둘 모여들어 마을과 도시를 지었다. 우리는 보고 들었다. 사람들이 처음으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삶을 사랑하세요. 사랑에 빠진 이들의 머리칼을 흩는 마지막 바람이 불어올지라도, 위태로이 경청하세요. 어둠이 비추는 진실한 증언을 꼼꼼히 받아 적으세요. 여정을, 생명을, 불길을, 기억해 주세요. 피부에 밴 향기와, 말하는 목소리를 들어주세요. 너머의 수많은 빛과 행성들, 아직 알려지지 않은 법칙들을 찾아 헤매어 주세요. 그렇게 기다려 주세요.
저자 윤희준
외지 사람이다. 겨울에 태어나 숨죽여 살아왔다.
먼 곳의 바닷가는 사철 비안개로 자욱하다. 이따금 수도로 향할 때면 적대적인 도시의 배격을 감내한다. 경계인의 정체를 낱낱이 드러내는 태양에는 온기가 없고, 숨거나 도망칠 틈새 하나 없이 사방이 낯설고 두려운 시선들뿐이다.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리라고 확신한 적 있었다. 지금도 기적은 믿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하다. 이 시집은 사멸과 불안의 도로에서 기어이 엮어내고야 만 생존의 흔적이다.
출판사 리뷰
윤희준 작가의 『무풍지대』는 고요와 침묵 속에서 존재의 본질을 사유하는 시집이다. 미학, 신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실재의 기원에 대해 노래한다. 특히 빛과 어둠, 탄생과 소멸, 사랑과 고독이라는 근원적인 주제들에 대해 작가만의 꾸미지 않은 언어로 그려낸다.
작가는 『무풍지대』와 같은 절대적 고요 속에서 영혼의 고백을 이어간다. 작품을 통해 그는 사랑이 자신을 영원한 고요로 이끌지라도 삶을 사랑하며 나아가겠다고 역설하기도, 회귀하는 사유 속에서 말의 이면을 발견하기도 한다. 작가의 소리 없는 울림이 세상의 소음 속에서 길을 잃은 이들에게 온전히 전해지기를, 마침내 그들이 각자의 ‘무풍지대’를 찾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페스트북 편집부
기사
머니투데이 · 2025년 9월 11일윤희준 작가 '무풍지대', 페스트북 추천 도서 선정기본정보
| ISBN | 9791169298636 |
|---|---|
| 발행일 | 2025년 8월 18일 |
| 쪽수와 크기 | 124쪽 · 135×210mm, 두께 11mm |
| 출판사 | 페스트북 |
| 분야 | 국내도서 |
